[역사 고증] 런던탑의 두 왕자:
요크 왕가의 에드워드 5세, 78일 천하의 권력 투쟁사

2026년 개봉 화제작 <왕과 사는 남자>의 비극적 어린 왕 이야기는 동양뿐 아니라 서양에서도 그 비극적 평행선을 찾을 수 있습니다. 15세기 후반 잉글랜드 요크 왕조 말기, 불과 열두 살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나 숙부의 계략에 희생된 에드워드 5세의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그는 아버지 에드워드 4세 사후 즉위했으나, 78일 만에 폐위되고 동생과 함께 런던탑에 갇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비운의 군주입니다. 본 포스팅에서는 대중매체에서 종종 다루어지는 가상의 이야기나 야사를 배제하고, 오직 사료에 근거하여 에드워드 5세가 겪은 옥좌 주변의 냉혹한 권력 다툼을 고증합니다.
> 잉글랜드 에드워드 5세(Edward V)
> 활동 연도: 출생 1470년 11월 2일 ~ 사망 1483년경? / 재위 1483년 4월 9일 ~ 1483년 6월 26일 (약 78일)
> 1차 사료: 해당 시기의 의회 기록, 당대 사가들의 기록(리처드 3세 즉위를 찬성한 측과 반대하는 측의 기록이 상이함).
학계 논쟁: 에드워드 5세와 동생의 최종적인 사망 시점 및 암살범에 대한 논쟁 지속 (리처드 3세 설이 통설이나 헨리 7세 설 등도 존재).
팩트 요약: 에드워드 4세의 장남으로 즉위했으나, 숙부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와 왕의 모친인 엘리자베스 우드빌 측근 세력 간의 권력 투쟁이 발생. 리처드가 왕의 혼인 무효를 주장하며 우드빌 가문을 축출하고 리처드 3세로 즉위하며 5세는 폐위되어 런던탑에 감금됨.
1. 장미 전쟁의 혼란 속에서 태어난 왕세자: 불안정한 왕조의 그림자
에드워드 5세가 태어난 1470년은 잉글랜드 역사상 가장 격렬했던 ‘장미 전쟁(Wars of the Roses)’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였습니다. 그의 아버지 에드워드 4세는 랭커스터 왕조의 헨리 6세를 몰아내고 요크 왕조를 열었으나, 왕권은 여전히 불안정했으며 대규모 귀족 세력들의 지지와 반대가 교차하고 있었습니다. 에드워드 5세는 아버지가 잠시 망명해있을 때인 1470년 11월 2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성역에서 태어났는데, 이는 당시 요크 왕조의 위태로운 상황을 반영하는 상징적인 배경이었습니다. 1471년 에드워드 4세가 헨리 6세를 다시 축출하고 복위하면서 에드워드 5세는 웨일스 공 작위를 받고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아버지의 통치 기간 내내 왕조의 불안정성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녔습니다.
에드워드 4세는 자신의 지지 기반이었던 네빌 가문을 배척하고, 왕비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친족들에게 지나치게 많은 작위와 재산을 분배하여 친위 세력을 구축했습니다. 이러한 비합리적인 인사 정책은 과거의 공신들의 불만을 초래했고, 이는 결국 네빌 가문의 워릭 백작이 랭커스터 왕조 편에 서서 반란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비록 워릭 백작은 패배했으나, 왕실 내부의 불화와 권력 기반의 약화는 에드워드 4세 사후 어린 후계자에게 심각한 위협으로 작용할 씨앗이었습니다.
2. 12세의 즉위와 섭정 체제의 충돌: 우드빌 대 리처드의 권력 투쟁
1483년 4월, 에드워드 4세가 갑작스레 사망하자 12세의 에드워드 5세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어린 왕의 신병과 섭정 문제는 필연적으로 권력 투쟁을 야기했습니다. 섭정의 자리는 왕의 숙부인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미래의 리처드 3세)가 차지했으나, 실질적인 권력은 왕의 모친이자 왕비였던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그녀의 친족들에게 있었습니다. 이 두 세력 간의 충돌은 단기간에 폭력적인 양상으로 치달았습니다.
리처드는 우드빌 가문의 권세 확대를 견제하고 왕의 안전을 명분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남동생인 리버스 백작 앤서니 우드빌과 에드워드 5세의 이부 형인 리처드 그레이를 체포하고 처형하는 강경책을 사용하며 우드빌 세력을 완전히 궤멸시켰습니다. 이 과정에서 리처드는 왕의 대관식을 의도적으로 연기하며 자신의 권력 기반을 다졌고, 동시에 당시 평민 출신 왕비와의 혼인 문제를 거론하며 에드워드 4세의 결혼이 무효였다는 주장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이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에드워드 5세와 그의 동생들은 모두 사생아가 되어 왕위 계승 자격을 잃게 되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습니다.
3. 78일간의 왕위와 런던탑 감금: 왕권의 완전한 소멸
결국 1483년 6월 26일, 영주들과 평민들이 연 의회는 리처드의 주장을 수용하여 에드워드 4세의 결혼을 무효로 선언했고, 에드워드 5세는 공식적으로 폐위되었습니다. 그의 재위 기간은 불과 78일에 불과했습니다. 폐위된 에드워드 5세와 그의 동생 요크 공작 리처드는 안전을 이유로 런던탑(Tower of London)에 감금되었습니다. 어린 왕자들의 감금은 당시 사회에 큰 충격이었으나, 숙부 리처드가 권력을 장악한 후 두 왕자는 공식적으로는 ‘실종’ 상태가 되었습니다.
에드워드 5세와 동생의 최종적인 최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합니다. 통설은 권력을 쥔 리처드 3세가 1483년 8월경에 자객을 보내 두 왕자를 살해했다는 것이며, 이는 베개로 질식시켰다는 등의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후 리처드 3세가 헨리 7세에게 패배한 후에도 이 의혹은 이어졌으나, 당대의 권력 구도상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리처드 3세로 지목되어 왔습니다.
4. 권력의 정통성과 실질적 기반의 균형에 대한 성찰
에드워드 5세의 비극은 잉글랜드의 랭커스터-요크 왕조 교체기에서 발생한 권력 투쟁의 전형입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완벽하게 상속된 ‘적통’을 지녔으나, 이를 지켜줄 ‘정치적 실력(기반)’과 ‘세력’이 뒷받침되지 못했습니다. 숙부 리처드는 왕위 계승의 정통성은 다소 약했을지라도, 네빌 가문의 잔여 세력과 우드빌 가문에 대한 반감을 등에 업은 귀족들의 지지를 확보하는 ‘실질적인 권력 기반’을 성공적으로 구축하여 왕좌를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우리 삶에 중요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현대 사회에서 ‘학력’이나 ‘출신 성분’처럼 상징적으로 주어지는 ‘정통성’만큼이나, 실제로 일을 성사시키고 위기를 돌파하는 ‘실질적인 역량과 지지 기반’이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젊은 나이에 큰 프로젝트나 조직의 리더 자리에 섰을 때, 타고난 자격만 믿고 기존 세력과의 관계 관리를 소홀히 하거나 자신의 지지 기반이 취약하다면, 예측하지 못한 ‘숙부’의 도전 앞에 모든 것을 잃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진정한 성공과 지속 가능한 권력(혹은 영향력) 유지를 위해서는 타고난 자격과 함께, 끊임없이 실무 역량을 연마하고 신뢰할 수 있는 협력자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내실 다지기’가 필수적입니다. 바로 이것이 런던탑에 갇힌 어린 왕에게서 배울 수 있는 현대적 ‘처세술’이자 ‘위기관리론’입니다.
관련 추천 글:
왕과 사는 남자, 단종의 짧고 굵은 비극: 권력의 무상함